♤ 가을 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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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군위넷 댓글 댓글 0건 조회조회 3,109회 입력 기사입력 : 20-10-28 09:36본문
<1>
그 푸른 하늘에
당신을 향해 쓰고 싶은 말들이
오늘은 단풍잎으로 타버립니다.
밤새 산을 넘은 바람이
손짓을 하면
나도 잘 익은 과일로
떨어지고 싶습니다.
당신 손안에
<2>
호수에 하늘이 뜨면
흐르는 더운 피로
유서처럼 간절한 시를 씁니다.
당신의 크신 손이
우주에 불을 놓아
타는 단풍잎
흰 무명옷의 슬픔들을
다림질하는 가을
은총의 베틀 앞에
긴 밤을 밝히며
결 고운 사랑을 짜겠습니다.
<3>
세월이 흐를수록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옛적부터 타던 사랑
오늘은 빨갛게 익어
터질 듯한 감홍시
참 고마운 아침이여
<4>
이름없이 떠난 이들의
이름없는 꿈들이
들국화로 피어난 가을 무덤 가
흙의 향기에 취해
가만히 눈을 감는 가을
이름없이 행복한 당신의 내가
가난하게 떨어져 누울 날은
언제입니까
<5>
감사합니다. 당신이여
호수에 가득 하늘에 차듯
가을엔 새파란 바람이고 싶음을
무량(無量)한 말씀들을
휘파람 부는 바람이고 싶음을
감사합니다.
<6>
당신 한분 뵈옵기 위해
수없는 이별을 고하며 걸어온 길
가을은 언제나
이별을 가르치는 친구입니다.
이별의 창을 또 하나 열면
가까운 당신
<7>
가을에 혼자서 바치는
낙엽빛 기도
삶의 전부를 은총이게 하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의 매일을
기쁨의 은방울로 쩔렁이는 당신
당신을 꼭 만나고 싶습니다.
<8>
가을엔 들꽃이고 싶습니다.
말로는 다 못할 사랑에
몸을 떠는 꽃
빈 마음 가득히 하늘을 채워
이웃과 나누면 기도가 되는
숨어서도 웃음 잃지 않는
파란 들꽃이고 싶습니다.
<9>
유리처럼 잘 닦인 마음밖엔
가진 게 없습니다.
이 가을엔 내가
당신을 위해 부서진
진주빛 노을
당신의 이름 하나 가슴에 꽂고
전부를 드리겠다 약속했습니다.
가까이 다가설수록
손잡기 어려운이여
나는 이제 당신 앞에
무엇을 해야 합니까
<10>
이끼 낀 바위처럼
정답고 든든한 나의 사랑이여
당신 이름이 묻어오는 가을 기슭엔
수만개의 들국화가 떨고 있습니다.
화려한 슬픔의 꽃술을 달고
하나의 꽃으로 내가 흔들립니다.
당신을 위하여
소리없이 소리없이
피었다 지고 싶은
<11>
누구나 한번은
수의(壽衣)를 준비하는 가을입니다.
살아온 날을 고마와하며
떠날 채비에
눈을 씻는 계절
모두에게 용서를 빌고
약속의 땅으로 뛰어가고 싶습니다.
<12>
낙엽 타는 밤마다
죽음이 향기로운 가을
당신을 위하여
연기로 피는 남은 생애
살펴주십시오
죽은 이들이 나에게
정다운 말을 건네는
가을엔 당신께 편지를 쓰겠습니다.
살아남은 자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아직은 마지막이 아닌
편지를 쓰겠습니다.
- 이해인 수녀님의 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