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와 Y의 인생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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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군위넷 댓글 댓글 0건 조회조회 709회 입력 기사입력 : 23-04-02 19:00본문
K의 인생 이야기
K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가 재혼을 하셨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했습니다. 계모는 밥을 제때 해주지 않았습니다. 계모가 해주는 밥을 먹고 학교에 가면 지각을 했습니다. 지각을 하면 교문에서 규율부로부터 구타를 당하고 기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아침밥을 굶고 학교에 가면 아침과 점심을 모두 굶고 저녁을 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루를 저녁 한 끼만 먹고 살려니 배가 너무 고파서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K는 등교를 포기하고 아버지 몰래 고모의 집으로 갔습니다. 수소문 끝에 고모 집에 아들이 있는 것을 확인한 아버지가 데리러 와서 집으로 가자고 했지만, 아침밥을 먹고 등교하자니 규율부의 구타와 기합을 감내하기 어렵고 아침밥을 굶고 등교하자니 배가 고파 살 수 없으니 안 가겠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K에게 방을 얻어줄 테니 자취를 하면서 학교에 다닐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렇게 하겠다고 하고 K는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고, 아버지가 중학교 인근 마을에 초가지붕의 빈집을 무료로 임차하였고, 그 빈집에서 자취를 하며 학교를 다니다 하숙도 몇 개월 하였고 가정교사도 하면서 우여곡절 끝에 중학교를 졸업했습니다.
K는 25살 때 방위병으로 공군교육사령부 내에 있는 공군 2사관학교에서 근무했는데, 근무 한 달이 지나자 쌀도 떨어지고 연탄도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90원짜리 빵 한두 봉지로 하루를 살았고 어떤 날은 세 끼를 모두 굶었습니다. 그렇게 몇 개월 지나다 보니 굶어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는다면 미래가 없습니다. 살아야 미래가 있는 것입니다. 사촌 여동생을 찾아갔습니다. 내 사정이 이러하니 5000원만 달라고 했습니다. 밥도 한 끼 얻어먹고 5000원을 수중에 넣으니 날아갈 것 같았습니다. 그 돈으로 과자를 사들고 인사처장(소령)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사정을 말하고 공군교육사령부 지원대대로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거기서 밥은 먹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1주일도 안 돼 지원대대로 발령을 받았고 세끼를 모두 부대 내에서 해결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군 복무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K는 부친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었지만, 김영삼 씨는 25살에 국회의원을 했는데, ‘이 정도는 내 스스로 해결해야지'라고 생각했습니다.
K에게는 부친의 환갑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돈은 없고 환갑비용 조달방법을 고민하던 중 방법을 찾았습니다. 공무원이던 그는 퇴직금을 담보로 공무원연금공단에서 대출을 받아 매월 조금씩 갚는 것입니다. 부친과 환갑잔치를 상의했습니다. 부친은 돈도 없고 부조가 들어올 데도 별로 없는데 환갑잔치를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모친의 환갑잔치는 대부분 안하지만, 부친의 환갑잔치는 모두가 하는 것이 당시의 관습이고 관행이었습니다. 만약 부친의 환갑잔치를 경제적 이유로 하지 않는다면 남들이 욕을 할 것입니다. 그 새끼는 제 애비 환갑도 안 하는 놈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부친을 설득했습니다. 환갑잔치 준비에 필요한 물건은 외상으로 갔다 쓰고 난 후 부조금으로 갚아주고 모자라는 돈은 제가 대출받아 월급에서 매월 조금씩 갚겠으니 아들 나쁜 놈 만들지 말고 환갑잔치를 하자고 했더니 부친은 마침내 응낙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부친의 환갑잔치를 하였는데 여러 동네의 이장들이 마을에서 방송을 했습니다. ○○○ 씨의 환갑잔치가 언제 어디서 있으니 참석하실 분은 참석하시라고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손님이 예상 외로 많이 왔고 부조도 예상 외로 많이 들어왔습니다. 환갑잔치 비용을 모두 계산하고도 돈이 몇백만원 남았습니다. 부친은 이 돈을 네가 갔다 두었다가 나 죽으면 묘소에 석물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K의 계모는 네 아버지 하고 안 살 테니 데리고 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부친은 당시 고등학생이던 둘째 아들을 불러 그 돈을 농 안에 갔다 넣으라고 했습니다. 한바탕 소동이 있기는 했지만 부친의 환갑잔치를 끝냈습니다. 환갑잔치를 마치고 몇 년이 지난 후 K는 장인을 통하여 들었는데 부친의 환갑 때 받은 부조금 중 남은 돈을 모두 큰아들이 가져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친척 몇 분에게 확인 한 바 계모가 그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K는 당장 계모와 따지고 싶었지만 부친의 만류로 참았습니다. 부친의 작고 후 계모에게 왜 그렇게 거짓말을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계모의 답변은 천연덕스럽게 가져가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이제 생각도 안 난다고 합니다. 발뒤꿈치도 보지 못하고 어떻게 허벅지 봤다고 하는 것인지, 죽은 후 그 죄를 어떻게 다 받으려고 그렇게 거짓말을 하는 것인지 참으로 궁금했습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K의 계모가 환갑이 되었습니다. 장수시대가 되고 보니 그때는 이미 우리 사회에서 환갑잔치가 없어졌고, 학창시절 단 한 번도 찾아주지 않았고 아들딸 돌 때도 찾아주지 않은 7살 연상의 계모이지만, 부친을 생각하여 계모에게 환갑기념 해외여행 비용으로 일백만원(당시 2박3일 태국, 중국 등의 여행비용이 1인당 50만원)을 주었습니다.
K의 부친은 건강하게 사시다가 88세에 운명하셨습니다. 부조금으로 부친의 장례비용을 계산하고 나니 900여만원 남았습니다. 900여만원을 테이블 위에 놓고 K와 K의 이복동생이 테이블 옆 의자에 앉았습니다. K의 이복동생은 형님이 300만원 가져가시라고 했습니다. K는 네가 모두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K의 이복동생은 남들도 형제간에 똑같이 나누어 가는데 왜 제가 모두 가져가느냐고 했습니다. K는 이복동생에게 다시 말했습니다. 내가 항렬이 형이지 나이가 형은 아니지 않느냐? 내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복동생은 19살 연상의 이복형 K가 시키는 대로 900여만원을 모두 가져갔습니다. 하지만 K는 누구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事必歸正, 아마도 K 같은 사람을 위로하는 말일 것입니다. 오늘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하루 종일 귓전을 맴돌고 또 맴돕니다.
Y의 인생 이야기
Y는 스물여덟 살에 결혼하여 스물아홉 살에 딸을 낳고 서른한 살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요즘이야 평균 결혼 연령이 남녀 모두 30세가 넘었으니 결혼 참 일찍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남자의 평균 결혼 연령이 스물여섯 살이었으니 결혼이 조금 늦은 것입니다.
Y는 사회적으로 남보다 우월하게 아들딸을 키우기 위해 많이 고민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경제적 어려움이 계속되었습니다. 아들이 돌도 안 돼 뇌막염에 걸려 충남대학교병원에 입원하고 4년여 동안 계속된 아내의 위장병은 의료보험 연간 치료일 수 상한인 180일이 가까워지면 한의원에서 치료를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뇌막염을 앓은 사람은 반신불수나 저능아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하여 Y는 한동안 고민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들은 다행히도 후유증이 없었고 총명했습니다. 글자와 숫자를 가르치니 아들딸은 경쟁이라도 하듯 열심히 그리고 잘했다고 합니다.
Y의 아내는 아들딸에게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과자를 사주는 대신 매월 용돈을 줬는데, 용돈을 받는 즉시 전액 새마을금고에 저금을 했고 둘이는 저금 경쟁을 했습니다. 부모가 시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Y의 아들딸은 경쟁적으로 했고, 다른 아이들이 과자 먹는 것을 보고 과자를 사달라고 하면 혼날까 봐 엄마에게 과자 사달라고는 못하고 과자가 먹고 싶다고 했습니다. 하는 짓이 기특하여 엄마가 용돈 외에 과자도 조금은 사주었다고 합니다.
Y의 아들은 초등학교 입학 후 공부를 잘하다 보니 선생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Y의 딸은 H대학교를 졸업하고 교사가 되었습니다.
Y의 아들은 초등학교 시절 토요일이면 담임선생(擔任先生)님의 지시에 따라 학교에 혼자 남았고, 담임선생님은 짜장면을 사주고, 가르치는 대로 아는 것이 신기하여 수학(數學) 공부(工夫)를 별도로 시켰고 장기와 오목도 가르친 후 같이 두었다고 합니다.
Y의 아들은 추첨으로 U고등학교(매년 서울대급 이상의 대학 합격생 3~5명 배출)에 진학했습니다. 고등학교 입학 초기에 진로를 고민하더니 고등학교 2학년 때 카이스트 합격을 목표로 세웠고 마침내 해냈습니다. 이때가 U고등학교 개교 32주년이었고 최초의 카이스트 합격생 배출이었습니다. 학교에서는 방송으로 카이스트 합격 소식을 전교생에게 알렸고 현수막도 내걸었으며 방송을 들은 많은 선생님들이 교실로 찾아와 축하를 해줬고 카이스트(KAIST) 합격생의 얼굴을 보기 위해 교실 앞에 많은 학생이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어려서부터 자동차를 유난히도 좋아했던 Y의 아들은 장학금을 받아 승용차(뉴아반떼XD)를 샀고, 방학 때 친구들과 만났다 귀가할 때면 친구들을 대문 앞까지 태워다 주곤 했다고 합니다.
Y의 아들은 카이스트 졸업 후 미국(美國) 유학(留學)을 포기하고 C의과학대 의학전문대학원을 나와 의사가 되었습니다.
Y는 아들딸을 남보다 우월하게 키우려면, 평생의 한이었던 가난으로부터 탈출하려면 돈을 모아야 했습니다. 공직자가 수입을 늘리려 한다면 공직 수명이 짧아지기 십상입니다. 지출을 줄이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Y의 아내는 미원과 미풍이 조미료 시장의 양대 산맥을 이루던 시절, 미원과 미풍이 그 맛이 그 맛인 것을 알고 단위중량당 가격을 계산해보고 조미료를 구입하곤 했다고 합니다.
Y는 결혼 때 처가에서 해준 신사복과 코트를 아끼고 아끼다 세탁 한 번도 못하고 그냥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결혼 때는 깡말랐던 몸이 비대하여 입을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Y는 두 자식이 모두 대학을 합격하고 난 후에 처음으로 가족외식(家族外食)을 했고 가족소풍(家族逍風)을 갔으며, 가족의 건강을 생각해 가끔 고기를 집에서 먹을 때는 절약하기 위해 고기를 먹지 않았고 회식이나 친목 모임에서 고기를 먹는 것으로 영양 보충을 대신했습니다. 지금도 반찬이 맛이 없을 땐 밥을 조금 먹으니 살이 빠져 좋고 쌀값이 조금 들어 좋겠구나 하고 긍정(肯定)적으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해마다 몇 차례씩 서울에 다녀왔는데, 새벽 4시에 일어나 서울행 첫차를 탔고 오후 4시경 귀가하여 점식식사 겸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점심값을 아끼기 위해서였습니다. 또 단독주택을 구입하면서 약간의 채무가 있을 때는 구내식당에서 한 끼에 1200원하는 점심을 굶었습니다. 그러니까 Y의 부부는 더 이상은 불가능하다고 할 만큼 내핍생활을 했습니다.
Y는 그동안의 고생과 아들딸의 성공은 하나님이 주신 팔자(근거 : 요한복음 9:1~3)라고 말합니다. 이 고생은 산교육으로 좋은 자식 교육이었으며, 자식은 부모를 닮습니다. 그래서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Y는 아들딸이 사는 모습을 보면서 그런 생각은 더욱 공고해졌다고 합니다.
Y는 이제 남은 인생을 건강하고 즐겁고 보람있게,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사는 것이 최고라는 생각이 든다고 합니다.
미국의 노엘존슨은 폐인이고 중환자(심장병)로 살았으나, 71세부터 복싱을 연마하여 세계 시니어 복싱챔피언을 다섯 차례 방어했고, 90세에 마라톤과 복싱으로 30대 건강을 유지한 전설적 실존 인물입니다.
그 전설적 실존 인물 노엘존슨을 본보기로 하여 Y는, 건강 나이가 실제 나이보다 젊어졌으면 하는 것이 간절한 바람이라고 하며, 틀림없이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 근거는 마태복음 7장7절 말씀"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와 마가복음 9장23절 말씀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라고 합니다.
Y는 "시기는 뼈의 썩음이라"는 잠언 14장30절 말씀을 모든 인간이 깨달아서 시기 없는 세상이 되게 하옵시고, 믿음을 무너뜨리려는 세상과 육신과 마귀로부터 가족을 지켜주시옵고, 하나님의 말씀에 감사하고 순종하는 삶이 되기를 기도한다고 합니다.
- 시인/수필가 김병연 -